가장 중요한 20대, 그리고 방황했던 20대의 기록
20대 초반...
그저 철없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좋았고, 그렇게 매일을 시간을 허비하다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듯 군대를 가야했습니다.
군을 제대하고 나니 눈 깜박한 것처럼 금방 20대 중반이 되어 있었고,
아무런 준비 없이 20대를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이 답답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들이 초조해 졌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벌써 기반을 잡아 결혼한 친구도 있었고 함께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도 점점 일로 바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혼자만 뒤처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는 항상 부모님의 잔소리와 걱정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고,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의 마을을 잘 알면서도 그런 관심과 걱정조차도 부담으로 다가와 부모님과 마주치기 싫어 졌고 부모님과 마주치면 오히려 버럭 성질을 내고 인상을 쓰고 다녔습니다.
나는 불효자인가...부모님께 잘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과 현재의 이런 상황이 가장 답답할 내 심정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복잡하기만 한 마음의 짐들을 대처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매일같이 사랑방 신물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2011년 제생일 하루 전 유치원때부터 친구인 죽마고우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왔습니다. 안성에서 기술일용직을 할 생각이 없냐는 전화에 저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광주에서 안성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해본 적 없는 저에게 타지생활과 일용직은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처음엔 내손으로 무언갈 만지고, 고치고 그걸로 인해 생산기반이 갖춰지고 제품이 생산 되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삼성에 들어가 설비를 고치는 작업도 뭔가 전문가가 된 듯한 느낌에 뿌듯했습니다.
보람도 잠시, 일용직이라 36시간을 일한적도 있었고 비수기 때에는 1달에 10일도 출근을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일이 없어서 아무 것도 없는 원룸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면 비관적인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밤새도록 야근을 하더라도 매일 아침 출근할 곳이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용직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용으로 전전하던 생활을 접고 2013년 다시 광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0대 초중반과는 틀리게, 기술일용직으로 일했던 경력을 살려 친구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공장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년차 근무 하던중 어느 날 위험한 설비로 인해 눈을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제 눈을 보시곤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남들이 피땀 흘리며 취업을 준비할 때 아무 준비 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아무렇게나 살아온 내 자신이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으며, 또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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